단 한순간에도 유통 시장은 조용할 틈이 없지만, 2025년 5월 14일 홈플러스가 던진 한 줄짜리 공지는 그야말로 격랑의 서막이었습니다. ‘임대료 조정 협상이 결렬된 17개 점포의 임대차 계약을 해지했다.’
불과 스물네 글자도 채 되지 않는 말이 가져온 후폭풍은, 2015년 사모펀드 MBK파트너스가 홈플러스를 인수한 이후 10년간 켜켜이 쌓여 온 부채와 구조적 위기를 한순간에 응축해 보여 줍니다.
“청산 공포”라는 표현이 유통업계와 금융권을 가로질러 속삭여지고, 노동자‧점주‧임대인‧소비자까지 다섯 갈래의 이해관계가 동시에 떨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유통 공룡의 균열은 어디서 시작됐고, 어디까지 이어질까요? 지금부터 그 복잡한 퍼즐을 하나씩 맞춰 보겠습니다.
홈플러스 17개 점포 계약 해지
홈플러스는 총 126개의 전국 매장 가운데 68개를 ‘임차점포’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중 61개 매장이 올해 초부터 임대료 인하를 두고 집요한 줄다리기를 이어 왔습니다.
사측은 “매출 부진과 고금리 환경 탓에 임대료를 최소 30%, 최대 50%까지 낮춰야만 회생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임대인 측은 “수익률 악화는 홈플러스 내부 경영 실패와 사모펀드의 과도한 차입 부담 때문”이라며 버텼습니다.
결국 버팀목이 허물어진 곳이 열일곱. 점포별 계약 해지 통지서가 발송되는 순간, 임대료 미지급 상태였던 이들 매장은 사실상 ‘폐점 예비 리스트’로 분류됐습니다. 숫자로 환산하면 전체 매출의 12%가 단숨에 공중에 뜨는 셈이고, 본사 자구책이 실패할 경우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불안을 키우는 또 하나의 변수는 ‘깜깜이 정보’입니다. 홈플러스는 폐점 가능성이 높은 점포 명단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지역 단위로 매장이 한 곳뿐인 중소도시에서는 해당 매장이 곧 ‘지역 상권’의 중심입니다.
밤늦게까지 진열대와 계산대를 지키는 노동자, 대출로 매장을 꾸려 놓고 홀로 중간 매대에서 물건을 팔아 온 입점 점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대형마트를 들르는 주민들까지 모든 이해관계자가 한꺼번에 잣대 없는 공포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홈플러스 ‘세일앤드리스백’이 남긴 빚의 늪
문제의 발단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MBK파트너스는 사상 최대 규모의 레버리지드 바이아웃(LBO)을 성사시키며 홈플러스를 품었습니다. 인수대금 7조 2,000억 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차입금이었고, 그 무게는 고스란히 홈플러스의 재무제표에 찍혔습니다.
이후 MBK는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세일앤드리스백(점포 매각 후 재임대)’ 전략을 본격화했습니다. 점포 매각 대금으로 현금을 확보하고, 해당 점포를 다시 빌려 쓰며 영업을 지속해 수익을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었죠.
처음엔 그럴싸했습니다. 매각 대금은 인수금융 이자를 메우고, 단기 배당 재원으로 일부 활용됐습니다. 그러나 한혜진의 높은 하이힐처럼 장밋빛이던 그림에는 숨겨진 굽이 있었습니다. 점포를 팔수록 비대해지는 리스부채, 임대료로 변신한 고정비용이 매년 매출을 갉아먹었습니다. 2024년 기준 임대료 부담은 4,500억 원, 장‧단기 리스부채는 5조 원이 넘습니다.
금리가 두 배 오르는 동안, 홈플러스 영업이익률은 2% 아래로 추락했는데, 이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최악’이란 평가가 수식어처럼 붙습니다. 결국 세일앤드리스백은 회사를 살리기보다, 거꾸로 라는 부정적 피드백 루프를 만들어냈고, 현재 회생절차의 직접적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홈플러스 회생절차 타임라인
2025년 3월 4일, 서울회생법원은 홈플러스의 기업회생 신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법정관리 개시 결정과 동시에 채권 신고 기간이 설정됐고, 홈플러스는 월별 임차료와 상품 대금을 ‘채무자 관리 재산’ 형태로 법정 신탁 계좌로 이체하면서 구조조정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가장 큰 관문은 6월 12일로 예정된 ‘회생계획안’ 제출입니다. 이 안에는 부채 탕감 비율, 신규 자본 조달 계획, 점포 구조조정 로드맵, 고용 유지 방안 등 이해관계를 타고 흐르는 혈관 같은 데이터가 빼곡히 담겨야 합니다.
만약 홈플러스가 임대인과의 재협상을 매듭짓지 못하면, 법원은 ‘퇴출 점포 리스트’를 승인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 순간 내부에서 쓰나미가 밀려오듯 매출 손실과 고정비 축소 사이에서 영업망이 찢겨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법정관리 전문가들은 “회생계획안이 통과되더라도, 임대료 인하를 담보하지 못하면 결국 매각이나 청산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라고 입을 모읍니다. 6월 12일은 단순한 채권자 집회 날짜가 아닌, 홈플러스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마지노선입니다.

임대료 50% 인하와 수익성 반감의 치킨게임
임대인 협상은 표면적으로 ‘수익률’ 싸움이지만, 실상은 부동산 시장의 가격 사이클과 매장의 지역 상권 가치, 사모펀드의 자금 회수 압력이 뒤엉킨 복합 방정식입니다. 주요 임대인은 금융권 연기금, 부동산 펀드, 일부 지역 재력가까지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이들의 요구는 간단합니다. “임대료를 시장가 이하로 조정하려면, 남은 계약 기간을 단축하거나 위약금을 확대해 리스크를 보전하라.” 그러나 그렇게 되면 홈플러스의 회생 시나리오는 또다시 시행착오에 빠집니다. 매각 또는 재임대 비용이 늘어나는 만큼 영업 현금흐름이 마르기 때문이죠.
반면 홈플러스는 “매장당 평균 매출이 2017년 대비 35% 감소해, 임대료 비중이 매출의 8%선을 넘으면 적자를 피할 수 없다”는 내부 자료로 맞서고 있습니다. 영업 손실이 눈덩이처럼 커진 지금, 임대료에 칼을 대지 않으면 회생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입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이 협상을 ‘치킨게임’에 빗댑니다. 차를 세우고 먼저 내리는 순간 손실을 안게 되는 구조에서, 두 플레이어가 끝까지 가속페달을 밟는 형국이라는 얘기입니다. 누가 먼저 눈을 감을지가 아니라, 어느 순간 둘 다 멈출 수 없다는 점이 더 문제라는 것이죠.
홈플러스 최대 1만 명 일자리 ‘붕괴 시나리오
홈플러스는 “폐점 시 고용 승계 또는 순환 배치를 통해 인위적 구조조정은 없을 것”이라고 공언하지만, 현장 노동자들의 체감은 전혀 딴판입니다. 서울과 경기 북부, 영남권 등 매장 한 곳이 곧 지역 유통 허브인 곳에서는 직원들이 통근에 편도 두 시간이 넘는 다른 지점으로 발령을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질적인 강제 전출인 셈이죠. 이미 2019년 대형마트 의무휴업제,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2022년 고금리 사이클을 거치며 상당수 노동자가 근무시간 축소와 계약직 전환을 겪었습니다. 홈플러스지부가 추산하는 잠재적 실직자 규모는 최대 1만 명, 협력업체를 포함하면 1만 5,000명에 달합니다.
입점업체 점주들의 위기는 더 급박합니다. 통상 대형마트에 입점한 소상공인은 본사에 매출의 3~27%를 ‘수수료’로 내고, 판촉 지원금을 추가 부담합니다. 여기에 정산 지연 리스크가 겹치면, 단 한 달만 대금이 묶여도 현금흐름이 탈진 상태에 빠집니다.
이미 일부 점주는 ‘홈플러스 결제단말기’ 대신 자체 단말기를 들여오며 생존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사가 ‘계약 위반’이라는 경고장을 보낼지 모른다는 공포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한 입점 카페 사장은 “점포의 문이 닫히면 남는 건 5년치 시설 투자금과 연대보증 대출뿐”이라고 토로합니다.
나비 효과는 지역경제로 번집니다. 매장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텅 빈 앵커 상가가 생기고, 주변 치킨집과 세탁소 매출이 동반 하락합니다. 수익성이 악화한 임대인은 부동산 대출 상환에 차질이 생겨 파산 위험이 커집니다. 결국 하나의 대형마트가 무너지면, 직간접적으로 엮인 이해관계자가 몇 겹의 도미노로 쓰러질 가능성이 큽니다.
사모펀드의 사회적 책임 논란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쏟아내는 비판의 화살은 명확히 MBK파트너스를 향하고 있습니다. 홈플러스 인수 후 매년 수천억 원 규모의 배당을 챙겼다는 의혹, 점포 매각 차익이 본사 부채 상환이 아닌 투자자 회수로 쓰였다는 의심 등이 따갑습니다.
2025년 3월 16일 김병주 회장은 “사재를 출연해 소상공인 결제대금 1조 8,000억 원을 변제하겠다”는 입장문을 발표했으나,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 구체적 실행 방안은 보이지 않습니다. 국회 정무위원회가 예고한 MBK 청문회도 정치 일정을 이유로 지연되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금융감독원은 “홈플러스 채권은행단(우리은행·KEB하나은행 등) 및 유통협력사와 컨소시엄 형태의 공동관리 감독”을 검토 중이지만, 실질적 카운터파트가 MBK인지 홈플러스 경영진인지조차 불분명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모펀드의 경영 실패를 둘러싼 책임 소재, 레버리지드 바이아웃 구조의 규제 미비, 전략적 매각(파이어 세일) 시 채무자 보호 방안 등 풀어야 할 매듭이 한동안 정치‧경제권의 뜨거운 감자로 남을 전망입니다.
‘청산’과 ‘정상화’ 갈림길: 대형마트가 살아남을 세 가지 해법
첫째, 온라인‧퀵커머스 통합 전략. 대형마트는 이미 2020년대 초반 쿠팡·SSG닷컴·마켓컬리와의 경쟁에서 ‘소비자 경험’ 격차를 확인했습니다. 홈플러스가 재무적 투자를 유치하거나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어 온오프라인 풀필먼트 네트워크를 일원화한다면, 적어도 매출 감소 속도를 늦출 수 있습니다.
둘째, 부동산 리포지셔닝. 해외 사례처럼 매각 후 재임대 모델을 물류 거점이나 복합 문화몰로 전환해 ‘임대료 vs 매출’ 구조를 바꾸는 겁니다. 실제로 이마트는 월계점 일부를 ‘스타필드 시티’로 리모델링하며 임대수익 구조를 개선했습니다. 홈플러스 역시 주택·교육·헬스케어 업종과 상생형 복합몰을 구축할 가능성이 거론됩니다.
셋째, ESG 리뉴얼을 통한 신규 투자자 유치. 지난해 유통업계가 실질탄소배출 제로(넷제로) 선언 이후, 글로벌 인프라 펀드와 연기금은 ‘ESG 턴어라운드’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홈플러스가 점포 전력을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고, 식품 폐기물 절감 프로그램을 본격화한다면, 고금리 상황에서도 상대적으로 낮은 조달 비용으로 투자 유치가 가능합니다.
물론 세 가지 카드 모두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임대료 협상이 ‘상생’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다시 짜이고, MBK파트너스가 응답해야 하며, 노동자와 입점업체가 실질적 보전책을 체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6월 12일 법원이 선택할 잣대가 ‘청산’보다 ‘정상화’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열립니다.
홈플러스 사태는 단지 한 대형마트의 위기가 아닙니다. 국내 유통산업 구조, 사모펀드의 경영 방식, 지역경제의 생태계, 소비자 후생까지 네 겹의 거미줄처럼 엮여 있습니다.
2015년부터 이어져 온 레버리지의 그림자는 신용 사이클이 가팔라질수록 짙어지고, 고용 현장의 불안은 팬데믹과 맞물려 더욱 커졌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채 한 달도 되지 않습니다.
회생계획안이 마지막 줄을 채우기 전에, MBK파트너스의 책임 있는 결단, 임대인의 상생적 선택, 정치권의 중재, 그리고 소비자‧노동자‧점주의 연대가 어우러져야 비로소 ‘청산 공포’는 폐기된 이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위기의 한복판에서, 진짜 해결책은 숫자가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홈플러스라는 거인의 클라이맥스는 아직 쓰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엔딩을 결정할 키는 여전히 우리 손에 남아 있습니다.